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밥 딜런/일생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훗날 자신을 ‘밥 딜런’이라 부른 사내, 로버트 앨런 짐머맨은 [[1941년]] [[5월 24일]] 오후 9시 5분[* 한국 시간 1941년 5월 25일 오전 11시 5분.], [[미합중국]] [[미네소타주]] 덜루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둘다 [[유대인]]이었고,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러시아 제국]]의 탄압을 피해서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조부 지그맨 짐머맨과 조모 안나 짐머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비어트리스 스톤, 통칭 비티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조부 벤자민과 조모 리파 에델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밥이 태어난 곳은 미 북부에 넓게 자리 잡은 5대호 중 하나인 슈피리어 호의 바람이 직접 밀어닥치는 곳이었다.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이 도시에 있는 스탠다드 석유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밥이 다섯 살도 되기 전, 병에 걸려 퇴직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 데이비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일가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비티의 친족들이 살고 있고 아버지 에이브러햄의 두 형제가 사업을 하고 있던 [[미네소타주]] [[히빙]]으로 이주한다. 철강업으로 번성하는 도시였고 주민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지방도시였다.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형제들이 경영하는 전파상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밥 딜런이 사람들에게 노래를 하게된 계기는 일가의 새로운 생활이 이제 막 시작된 그 무렵이었다.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모였을 때 동요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흐르는 성인 취향의 노래를 당당하게 소화해냈고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에서는 밥은 “열 살 때[* 밥 딜런의 기억의 오류로 실은 일곱살 때다.] 이사 온 집에 기타와 레코드 플레이가 달린 라디오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턴테이블에는 이전 거주자가 놓고 간 한 장의 레코드가 놓여있었다. 그 레코드에 수록된 ‘[[https://www.youtube.com/watch?v=0QvGjdu7_8E|Drifting Too Far from the Shore]]’를 들었을때 충격은 “곡을 듣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정한 부모는 따로 있는데, 엉뚱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밥 딜런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음악에 눈뜬 밥 딜런은 열 살 무렵 어머니의 날, 자신이 만든 시를 어머니에게 선사할 정도로 시 창작에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밥 딜런의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음악적 소양을 심어주기 위해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았던 것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개인 레슨을 위해 교사까지 집으로 모셨으나 정작 레슨을 받은 것은 동생 데이비드 뿐이었다. 밥 딜런은 “내 맘대로 치게 내버려두세요!” 라며 레슨을 극구 거부했다. 하지만 밥 딜런은 어느샌가 독학으로 연주법을 터득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아노를 독학 할 무렵, 밥 딜런은 ‘[[행크 윌리엄스]]’, ‘[[행크 스노]]’, ‘[[조니 레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음악에 몰입했고 당시 한참 인기를 끌던 페티 코모나 페티 페이지가 아니라, 보통 가수들과는 다른 느낌을 풍기는 독특한 가수들에게 이끌렸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 대한 밥 딜런의 열성은 대단했다. 새벽 2시, 3시까지 라디오에 심취해 있다가, 그 다음 [[리틀록]], [[시카고]], [[루이지애나주]]에서 발송되는 방송까지 듣게 됐다고 한다. 심야방송을 통해 ‘[[머디 워터스(음악가)|머디 워터스]]’, ‘[[존 리 후커]]’, ‘지미 리드’, ‘[[하울링 울프]]’ 등 흑인들의 [[블루스]] 세계에 빠젔다고 한다. 그만큼 어린시절부터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영향을 받았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음악만이 진실이었다. 그 무렵 음악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밥 딜런이 사는 히빙 거리에는 흑인 음악 레코드를 파는 가게가 없었다. 하지만 집에 있는 기타로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만 본인과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 친구는 좀처럼 없었고 가까스로 발견해낸 사람이 존 버클린이었다. 버클린은 기타와 테이프레코더도 가지고 있었다. 밥과 버클린은 라디오에서 들었던 곡에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믹스해서 직접 곡을 만들었다. 밥이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고 버클린은 기타를 쳤다. 버클린에 의하면 잼새션[* 재즈 연주자들이 모여서 악보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연주.]에서 밥이 최초로 만든 곡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노래했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 밥은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으며 이전보다 훨씬 시끄러운 음악인 [[로큰롤]]을 좋아하게 됐다. 또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이 출연한 영화에도 빠지기 시작한다. 특히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이 연기한 짐 스타크를 좋아했다. 또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텔레비전에서 [[리틀 리처드]]를 발견한 순간 즉시 좋아하는 가수 리스트에 넣었다고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기보다는 때려부수면서 열창하는 리차드의 스타일을 자기 집 피아노로 흉내내기도 했다고 한다. 또 헤어스타일마저도 리차드처럼 머리 꼭대기를 잔뜩 부풀어 오르게 하는 화려한 스타일로 바꾸었다. 이 당시 자신의 음악 취향과 잘 맞는 랠리 키건을 알게 되었고 생애 첫 밴드 ‘조커즈(JOKERS)’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유행하는 곡에 하모니를 넣어 노래하는 일종의코러스 그룹이었다. 여자애들의 반응도 좋아서 트윈 시티즈[* 미니애폴리, 세인트폴 두 도시를 합쳐 부를때의 애칭.]의 텔레비전 방송 미국 아마추어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1956년]] 여름, 딜런의 밴드 조커즈는 78 회전 다이렉트 컷 레코드[* 레코드 제작에서 통상 행해지는 오리지널 테이프에 대한 녹음, 편집 등의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 녹음한 음곡 등을 그 자리에서 믹스다운에서 만든 레코드.]를 만든다. 비용은 5달러였고 밥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밥 딜런 인생의 역사적인 첫 레코딩이었다. [[진 빈센트]]의 ‘비밥 어 룰라’, 더 펭귄스의 ‘Fallen Angel’이 수록되었다. ‘조커즈’는 1958년 봄, 멤버 랠리 키건이 사고를 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조커즈’ 활동과 병행해서 밥 딜런은 빌 마리낙, 래리 팻보, 척 나일라 등 세 친구들과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로 구성한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The Shadow Blasters)’를 결성한다. 밥은 리더격으로 피아노와 보컬을 담당한다. 자신이 꿈꾸던 리틀 리차드 스타일의 밴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는 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학생 재능 경연 대회에 참가한다. 핑크색 셔츠에 선글라스. 머리 꼭대기를 잔뜩 힘준 헤어스타일의 밥은 선자세 그대로 피아노를 첬다. 하지만 반응은 정말로 안좋았는데 학생들은 단체로 비웃었고 선생들은 전부 얼굴은 찌푸린 채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더 새도우 블래스터즈’는 그 후 주니어 칼리지 축제에도 출연했지만 그것이 마지막 활동이었다. 하지만 밥 딜런의 재능 경연 대회는 학교를 뒤흔들었고 학생들은 밴드활동을 하는 밥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됐고 교내에서 인기도 오른다. 학창시절 밥 딜런은 굉장히 조용한 학생이었다. 교사 본 롤프슨은 “무척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무척 영리했어요. 아주 점잖았던 걸로 기억해요”라고 당시 딜런을 회상했고 밥에게 [[사회학]]을 가르친 찰스 밀러는 “달랐어요. 생각이 있는 아이였죠. 확실히 재능을 보여주었지요. 나중에 ‘Blowin’ in the wind’를 듣고 나니 그 애가 우리 수업에서 사회적 연민을 보인게 기억이 나더군요”라고 말했다. 당시 밥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팝 스타가 되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밥은 [[일렉트릭 기타]]를 사서 코드 워크를 연습했다. 부친을 설득해서 핑크색 [[포드(자동차)|포드]] 자동차 컨버터블은 갖게 되었고, 심지어 대형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이때 오토바이로 종종 사고를 일으켰는데 자기 몸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표정 변화 없이 태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젔다고 한다. 이때 첫 여자 친구가 생기는데 [[핀란드]] 이민자 ‘[[https://i.pinimg.com/originals/a9/5b/0a/a95b0aa85d946dce113e34bc378cd995.jpg|에코 헬스트롬]]’이라는 금발 미소녀였다. 에코는 가죽자켓에 청바지 차림으로 다녔고 그 시절 소녀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반항적인 스타일이었다. 사귀자마자 밥은 그녀의 음악 취향을 물어봤고 자신과 라디오를 좋아하고 블루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중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밥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여자친구는 에코스타 외에도 존재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에서 밥은 “사랑 덕분에 내 안의 시인이 눈을 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밥 딜런은 새로운 밴드 ‘더 골든 코드(The Golden Chords)’를 만든다. 드럼과 기타, 그리고 밥 딜런의 피아노로 구성된 트리오였다. 전 밴드였던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 시절보다 한층 더 성장하게 되는데 피아노나 기타로 즉흥연주를 하고 더욱 파워풀하게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했다. 1958년 2월 10일 히빙 고등학교 교장 주최로 교내 집회 당일, 마술과 합창에 이어 더 골든 코드가 등장한다. 밥 딜런은 날뛰면서 피아노를 첬고 노래를 불렀는데 괴성을 지르며 ‘Rock’n Roll Is Here To Stay’를 부르다가 피아노를 페달을 너무 세게 밟아 부러진다. 교장인 K.L. 페더슨은 무대 뒤로 달려나가 마이크를 꺼버렸고 밥 딜런은 그걸 알고도 피아노를 쾅쾅 처댔다고 한다. 더 골든 코드는 그 후 몇번에 걸쳐 무대에 오른다. 1958년 3월 1일에는 현지 디스코 자키가 히트곡을 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파티에 초대받아 연주를 하게 된다. 밥 딜런 인생 최초 음악을 통해 현금을 쥐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밴드활동은 순조로운듯 보였으나, 밥 딜런 이외의 나머지 두 멤버는 라이브를 해나가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대중적인 음악을 원했고 자연스럽게 견해차로 해체한다. 1959년 1월 9일, 학교에서 다시 재능경연대회가 열려 밥 딜런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때의 밴드는 예전과는 다른 편성으로 기타, 베이스, 여성 코러스 세 사람과 밥 딜런으로 구성됐다. 밴드 이름은 ‘엘스톤 건[* 밥 딜런의 무대 이름.]과 더 록 바퍼스’였다. 아무런 리허설없이 즉흥으로 연주했고 밴드는 이 날에만 노래하고 끝이었다. 이때 당시 밥 딜런의 새로운 음악 우상이 등장했는데 바로 [[버디 홀리]]였다. 딜런은 홀리의 순수하고 아이같은 목소리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딜런의 많은 음반들의 특징적 목소리는 버디 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딜런은 1월 31일 덜러스에 공연을 하러온 버디 홀리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딜런이 그를 본지 사흘후 버디 홀리는 사고로 사망한다. 1959년 6월 밥 딜런은 히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결정한다. 졸업 기념 앨범 사진 아래에 첨부된 ‘장래의 꿈’이라는 코멘트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파일:27AE8276-41B6-406A-A5A5-CABC1EE15D4B.png|width=400]] >”[[리틀 리차드]]의 동료가 되는 것” 1959년 9월 밥 딜런은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한다. 밥 딜런은 대학 시절에 대해 ‘마이 라이프 인 어 스톨른 모먼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중에 대학교에 갔었지. 내가 한 번도 가진적 없는 사기같은 스칼라쉽. >과학 수업에 들어갔지만 토끼가 죽는 걸 안보려 해서 낙제점을 맞았지. >영어 수업에서는 영어 교사를 묘사하는 시험지에 욕을 써서 쫓겨났고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매일 전화로 결석을 알려서 낙제했고 스페인어 수업은 잘했지만 그건 아는거였고. >재미 좀 볼까해서 남학생 회관에서 어슬렁거려봤지. 처음에는 거기서 살아도 된다더니 나중엔 나가달라더군. >사우스 다코타 출신 여자애 둘과 방 두칸짜리 아파트에 들에가서 이틀 밤을 살았지. >다리 건너 14번가에, 햄버거와 농구 트레이닝복과 불독 조각상이 있는 서점 위층으로 살러갔지. >내 배를 무릎으로 걷어찬 배우 여자애한테 홀딱 반했지. >그리고 미시시피 강 동쪽 편으로 가게 되었지. >세븐 코너스 바로 남쪽 워싱턴 에비뉴 브리지 밑 압류된 집에서 친구들 한 열 명하고 같이 살았지. >내 대학 생활은 대략 그게 전부야. 그의 아버지는 “밥은 대학생 무리를 대단찮게 생각했어요. 대부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한 카운슬러가 회상하는 딜런의 대학생활은 “속은 모르겠고, 밤낮없이 드나들고, 보통 넋이 나가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미네소타 대학교의 인문예술 학과에 입학하긴 했어도, 그로부터 몇 달 안 되어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고 대학생들이 주로 시간을 때우던 딩키타운에서 살았다. 전공은 음악, 부전공은 급진적 생활양식으로 커피하우스의 고급 세미나와 신메이킹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당시 동아리 활동도 했었다. 밥 딜런은 바스티유에서 알게 된 여성, 프로 캐스트너로부터 [[우디 거스리]]의 음악을 들어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밥 딜런은 그 당시 우디 거스리를 잘 알지 못했다. 프로 캐스트너의 오빠는 우디 거스리의 음반을 가지고 있었고 밥 딜런에게 78회전 SP음반 12장 앞뒤로 수록된 세트를 준다. 이때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에게 압도된다. 반면 거스리의 매니아로 변한 밥 딜런을 나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포크송 레코드 수집가이자 연구자 존 팬캐이크(Jon Pankake)는 “그 상태로 아무리 해봤자 우디 거스리는 될 수 없을걸”이라며 밥 딜런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거스리의 노래를 통해 ‘노래란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임을 체감한 밥 딜런은 거스리의 노래에 몰입하면 할수록, [[미니애폴리스]]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머물 가치가 없음을 느꼈고 1960년 12월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를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한다. 대학을 그만두고 포크송의 중심지인 [[뉴욕]]을 목표로 미니애폴리스를 떠난다. [[크리스마스]] 직전 기타와 슈트케이스 하나만을 달랑 들고 히치하이크로 길을 나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